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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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864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정치인으로, 20세기 초 그리스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크레타 섬의 그리스 통합을 주장했고, 1889년 크레타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크레타 자치국 사법부 장관과 고등 위원 참사관을 역임했으며, 1909년 그리스 정계에 진출하여 1910년과 1911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총리직을 수행했다. 베니젤로스는 교육, 사회,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을 주장했으나 국론 분열로 인해 여러 차례 사임과 재임을 반복했다. 그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그리스 대표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1920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소아시아에서 패전하면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28년 재집권 후 터키와의 화해를 이끌었으나, 대공황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망명했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베니젤로스는 군주제 반대, 메갈리 이데아 옹호,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의 동맹 등 다양한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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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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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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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로마자 표기 | Eleuthérios Kyriákou Venizélos |
출생일 | 1864년 8월 23일 |
출생지 | 무르니에스, 오스만 제국(현재 그리스) |
사망일 | 1936년 3월 18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
국적 | 그리스 |
정당 | 자유당 |
배우자 | 마리아 카텔루주 (1891년–1894년) |
배우자 | 헬레나 스킬리지 (1921년–1936년) |
친척 |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조카) |
친척 |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증손자) |
자녀 | 키리아코스 베니젤로스 |
자녀 |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
모교 | 아테네 대학교 |
직업 | 정치인 |
직업 | 혁명가 |
직업 | 입법가 |
직업 | 변호사 |
직업 | 법률가 |
직업 | 언론인 |
직업 | 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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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국립 연구 재단 "엘레프테리오스 K. 베니젤로스" |
수상 경력 | |
훈장 | [[파일:GRE Order Redeemer 5Class.png|30px]]구세주 훈장 |
훈장 | [[파일:Legion Honneur GC ribbon.svg|30px]]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
훈장 | [[파일:POL Order Orła Białego BAR.svg|30px]]백수리 훈장 |
군사 복무 | |
전투 |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 크레타 반란 |
전투 | 테리소 반란 |
주요 직책 | |
그리스 총리 | 국왕: 요르요스 1세, 콘스탄티노스 1세 재임 시작: 1910년 10월 6일 전임자: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 퇴임: 1915년 2월 25일 후임자: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
그리스 총리 |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 재임 시작: 1915년 8월 10일 전임자: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퇴임: 1915년 9월 24일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
그리스 총리 |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 재임 시작: 1917년 6월 14일 전임자: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퇴임: 1920년 11월 4일 후임자: 디미트리오스 랄리스 |
그리스 총리 | 국왕: 요르요스 2세 재임 시작: 1924년 1월 24일 전임자: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퇴임: 1924년 2월 19일 후임자: 게오르기오스 카판타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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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총리 | 대통령: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재임 시작: 1932년 6월 5일 전임자: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우 퇴임: 1932년 11월 4일 후임자: 파나기스 차르다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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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주 총리 | 재임 시작: 1910년 5월 2일 퇴임: 1910년 10월 6일 전임자: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고등판무관) |
그리스 국방부 장관 | 재임 시작: 1917년 6월 27일 퇴임: 1920년 11월 18일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 수상: 자신 전임자: 아나스타시오스 하랄람비스 후임자: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
그리스 외무부 장관 | 재임 시작: 1915년 8월 23일 퇴임: 1915년 10월 7일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 수상: 자신 전임자: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후임자: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
크레타 주 법무부 및 외무부 장관 | 재임 시작: 1908년 퇴임: 1910년 |
크레타 주 법무부 장관 | 재임 시작: 1899년 4월 17일 퇴임: 1901년 3월 18일 |
2. 혈통과 유년기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864년 오스만 제국 크레타섬 하니아에서 잡화상인 키리아코스와 스틸리아니 사이의 다섯째 아이로 태어났다. 베니젤로스 가족은 1866년부터 1872년까지 그리스 시로스섬에서 생활하며 그리스 국적을 취득했다.[118]
베니젤로스는 아테네와 시로스섬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크레타섬에서 상업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리스 크레타 총영사였던 게오르기오스 지코마라스(el)는 베니젤로스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아테네 대학교 법학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했다.[120]
1883년 아버지 키리아코스가 사망하자 베니젤로스는 아테네와 크레타를 오가며 장사로 가정을 돌봤지만, 1885년 경제적 상황이 안정되자 아테네에서 학업에 전념했다. 1886년 영국 정치가 조지프 체임벌린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베니젤로스는 체임벌린에게 크레타섬 주민들이 그리스 통합을 원한다는 것을 열변했고, 체임벌린은 감명을 받았다. 1887년 베니젤로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크레타섬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신문 「레프카 오리(el)」의 편집 및 발행을 맡아, 크레타섬 주민들의 단결과 평화적 상황 조성 후 그리스 통합을 주장했다.[122]
2. 1. 조상
베니젤로스 가문의 조상들은 크레바타스(Crevvatas)라는 성을 썼으며 펠로폰네소스반도 남부 미스트라스에 살았다.[165] 1770년 오스만 제국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습격했을 때, 크레바타스 가문의 일원이었던 베니젤로스 크레바타스는 크레타로 피난하여 정착했다. 그의 아들들은 성을 '베니젤로스'로 바꾸었다.[165]국가 분열 기간 동안 정치인 콘스탄티노스 크레바타스는 자신의 가문이 베니젤로스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베니젤로스는 크레타의 한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아버지 키리아코스가 1821년 모넴바시아 공성전에 그의 형제 하치니콜로스 베니젤로스와 다른 세 형제와 함께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의 할아버지는 키티라 출신 상인 하치페트로스 베니젤로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8]
2. 2. 가족과 교육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864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크레타섬 하니아 인근의 무르니에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레타의 혁명가인 키리아코스 베니젤로스였다.[166] 1866년 크리티 반란이 일어나자, 베니젤로스 가족은 아버지가 반란에 가담한 탓에 시로스섬으로 피신했다.[167] 이들은 1872년 압둘 아지즈가 사면을 내릴 때까지 시로스섬에서 지냈다.엘레프테리오스는 시로스의 에르무폴리스에 있는 중등 학교에서 마지막 학년을 마치고 1880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1881년에는 아테네 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886년에 크레타로 돌아와 하니아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평생 독서를 즐겼으며,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익혔다.[165]

2. 3. 정계 진출
베니젤로스는 어린 시절 고향 크레타 섬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경험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 정부의 개혁 조치 번복으로 국제적인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베니젤로스는 1889년 4월 선거를 통해 크레타 자유당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166] 그는 뛰어난 웅변과 급진적인 주장으로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다.[169]1889년,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그리스 군의 현대화가 미흡하여 크레타 섬을 그리스에 통합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유럽 열강의 조언을 받아 신중하게 행동하면 크레타 섬을 그리스에 통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1896년 크레타 봉기에 지도자로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통합 노선을 걸었다. 그는 이 봉기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며, 실제로 유럽 열강이 봉기 참가자들에게 포격을 가하자 유럽과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크레타 섬의 그리스 정교도들은 협상 대상으로 인정받았고, 베니젤로스는 협상단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897년 4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이 발발하면서 협상은 중단되었다.[123]


1897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운동에 참여한 결과, 크레타 섬에 자치가 부여되었다. 그리스 왕국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섬 고등 위원의 참사관으로 일했다.[124]
그러나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소극적인 통치에 실망한 베니젤로스는 "에노시스(Ένωσις|그리스와의 통합grc)"를 주장하며 임시 국민 의회를 소집했다. 결국 게오르기오스는 총독직을 사임하고, 전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el)가 후임이 되었다.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섬 통합을 위한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크레타 섬 의회는 "에노시스"를 선포했다. 5명으로 구성된 통치 위원회인 오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의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했다.[125][126]
1909년 그리스 왕국에서 군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크레타 섬에서의 정치적 수완을 인정받은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정부에 의해 아테네로 초청받았다.[125] 총선 실시를 주장한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1910년 8월 8일과 11월 28일에 두 차례에 걸쳐 총선이 실시되었다. 8월 선거에서는 베니젤로스가 출마하지 않았지만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수파를 차지하지 못해 사임했고, 11월 선거에 출마하여 362석 중 300석을 차지하며 다시 총리로 임명되었다.[128][129]
3. 크레타 정계 활동
1889년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군의 현대화가 아직 미흡하여 크레타섬을 그리스에 통합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유럽 열강의 조언을 받아 기회를 포착하고 영리하게 행동한다면 크레타섬을 그리스에 통합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는 크레타섬 통합에 신중한 것이 아니라, 1896년 발생한 크레타 봉기 당시 지도자로 참여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봉기로 크레타섬이 즉각 그리스에 통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봉기를 외교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23]
1897년 베니젤로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 운동에 참여했고, 그 결과 크레타섬에 자치가 부여되었다. 그리스 왕국의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베니젤로스는 그 밑에서 크레타섬 고등 위원의 참사관으로 일했다.[124]
그러나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소극적인 통치를 계기로 베니젤로스는 "에노시스(enosis)"를 주장하며 임시 국민 의회를 소집했다. 그 결과 게오르기오스는 총독직을 사임하고, 전 총리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가 후임이 되었다. 베니젤로스는 이때 크레타섬 통합을 위한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크레타섬 의회는 "에노시스"를 선포했다. 5명으로 구성된 통치 위원회인 오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의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했다.[125][126]
3. 1. 크리티 반란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크레타섬에서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원하는 주민들에 의해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1866년~1869년 크레타 반란에서 양측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 열강의 압력으로 할레파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후 베를린 조약에 포함되어 크레타 그리스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 정부를 보장했다.[172] 그러나 크레타의 무슬림들은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크레타 행정이 그리스인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오스만 제국은 조약 규정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두 집단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고, 1880~1896년 사이에 군 병력을 파견하여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크레타 문제'는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외교 문제였다.[172]1897년 1월, 크레타 섬에서 폭력과 무질서가 심화되자, 하니아[173][174][175][176]와 레팀노[176][177][178]에서 기독교 주민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스 정부는 여론과 친우회[179], 그리고 열강의 압력을 받아 군함과 병력을 파견하였다.[180] 1897년 2월 3일, 콜림바리에 상륙한[181] 그리스 군대와 지휘관 티몰레온 바소스 대령은 그리스 국왕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하고 크레타와 그리스의 통합을 선언하였다.[182]
이때 섬에서 선거 유세를 다니던 베니젤로스는 "불타는 하니아를 보며"[184] 말락사로 급히 이동하여 2,000여 명의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아크로티리의 터키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계획하였다.[173] 터키군은 외국 제독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열강의 군함들은 아크로티리의 반란군 진지를 포격하였다.
On February 20, the admirals ordered [him] to take down the flag and disperse the rebels. He refused![185]영어
Venizelos returned to 수다 harbour, where the battleships were anchored, to explain, "You have your cannons! But we will not take down our flag"... [When the flag was hit by a shell] Venizelos rushed forward, but his friends stopped him, asking why he was risking his precious life in vain.[186]영어
On that famous day in February 1897, he defied the orders of the protecting powers, and the Greek newspapers wrote in eloquent sentences that he had "challenged the navies of Europe."[187]영어
Today, under the auspices of a gentle diplomat, he is a revolutionary who harasses the Turks of Crete and a daring commander who, with a small band of rebels, camps in the hills of 하니아 and defies the fleets and consuls of the great powers![188]영어
같은 날 저녁, 베니젤로스는 외국 제독들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는 크리티에 터키인들을 남겨놓지 않기 위하여 반란군은 유럽 전함의 포탄에 모두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썼다.[189] 이 서한은 해외 언론에 유출되어 그리스와 유럽에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183]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는 패배했지만, 외교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라클리오 학살[176][194][195] 이후 열강은 '크레타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크레타를 오스만 제국 종주권 아래 자치 국가로 선포하였다.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반란군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195] 열강 4개국이 크레타 행정을 맡았고,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가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베니젤로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크레타 자치국의 사법부 장관을 지냈다.[196]

요르요스 왕자는 3년 임기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196] 1899년 4월 27일, 요르요스 왕자는 베니젤로스를 사법부 장관으로 하는 행정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00년 5월 18일 베니젤로스가 사법 입법 완성안을 제출하면서 요르요스 왕자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요르요스 왕자는 유럽 순방 중 열강에게 그리스와 크레타의 병합을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197] 베니젤로스는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예상대로 열강은 왕자의 요청을 거부했다.[196][197]
요르요스 왕자가 궁전 건축을 희망한 반면, 베니젤로스는 크리티 주민들이 왕자의 통치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며 반대했다.[196]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베니젤로스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다.[198] 베니젤로스는 열강의 군대 주둔으로 크리티가 완전한 자치국이 아니며, 열강이 요르요스 왕자를 통해 섬을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1901년 3월 20일, 베니젤로스는 해임되었다.[196][199] 이후 3년간 그는 요르요스 왕자에 대한 반대파의 영수가 되어 정치 갈등을 일으켰다.
3. 1. 1. 배경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크레타섬에서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열망하는 주민들에 의해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1866년~1869년의 크레타 반란에서 양측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 열강의 압력으로 할레파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후 베를린 조약에 포함되어 크레타 그리스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 정부를 보장했다.[172]그러나 자신들을 오스만 투르크인으로 인식하는 크레타의 무슬림들은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크레타의 행정이 그리스인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오스만 제국은 조약 규정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두 집단 간의 긴장을 악화시켰고, 1880~1896년 사이에 상당한 군 병력을 파견하여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크레타 문제'는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외교 문제였다.[172]
3. 1. 2. 아크로티리 사건
1897년 1월, 크레타 섬에서 폭력과 무질서가 심화되자 주민들은 그리스와의 통합을 주장하는 측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측으로 나뉘었다. 하니아[173][174][175][176]와 레팀노[176][177][178]에서 기독교 주민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그리스 정부는 여론과 친우회[179], 그리고 열강의 압력을 받아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군함과 병력을 파견하였다.[180] 1897년 2월 3일, 콜림바리에 상륙한[181] 2,000여 명의 그리스 군대와 지휘관 티몰레온 바소스 대령은 그리스 국왕의 이름으로 섬을 점령하고 크레타와 그리스의 통합을 선언하였다.[182]이때 섬에서 선거 유세를 다니던 베니젤로스는 "불타는 하니아를 보며"[184] 하니아 근처의 말락사로 급히 이동하여 2,000여 명의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아크로티리의 터키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계획하였다.[173] 베니젤로스는 아크로티리에서 밤을 새며 그리스 국기를 세웠다. 터키군은 외국 제독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열강의 군함들은 아크로티리의 반란군 진지를 포격하였다. 포탄 파편으로 국기가 넘어지자 반란군은 즉시 국기를 다시 세웠다.
2월 20일에 제독들은 [그에게] 국기를 내리고 반란군을 해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부하였다![185]영어
베니젤로스는 전함이 정박하고 있는 수다 항구로 돌아가 설명하기를, "당신들은 대포를 쏘고 있소! 하지만 우리 국기를 내리지 않을 것이오"... [국기가 포탄에 맞자] 베니젤로스는 앞으로 뛰어가는데 친구들이 그를 막으며 왜 귀중한 목숨을 헛되이 위험케 하려느냐고 말했다.[186]영어
1897년 2월에 그 유명한 날에, 그는 보호 열강의 명령을 거부하였으며, 그리스의 신문에서는 유려한 문장으로 "유럽의 해군에 도전하였다."[187]영어
오늘날 유순한 외교가의 치하에서 크리티의 투르크인들을 괴롭히는 혁명가이자 하니아의 언덕에서 소규모 반란군 무리와 진을 치고 있는 대담한 지휘관인 그가 열강의 함대와 영사들에게 도전하였다![188]영어
포격이 있던 같은 날 저녁, 베니젤로스는 아크로티리에 있던 모든 수령들의 서명을 받아 외국 제독들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는 크리티에 터키인들을 남겨놓지 않기 위하여 반란군은 유럽 전함의 포탄에 모두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썼다.[189] 이 서한은 의도적으로 해외 언론에 유출되어 그리스와 유럽에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183]
3. 1. 3. 테살리아의 전쟁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은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192] 오스만 제국군은 폰 데어 골츠 남작의 군사 개혁 덕분에 전투 준비가 잘 되어 있었고, 그리스 군대는 몇 주 만에 후퇴하였다. 이후 열강이 개입하여 1897년 5월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193]전쟁에서 패배한 그리스는 테살리아 북부 국경 지역의 작은 영토를 잃고, 400만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라클리오 학살[176][194][195] 이후 열강은 '크레타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크레타를 오스만 제국 종주권 아래 자치 국가로 선포하였다.
3. 1. 4. 결과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97년 8월 25일 이라클리오 학살[194][195] 이후 열강(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은 '크리티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크레타가 오스만 제국 종주권 아래 자치 국가가 될 것을 선포하였다.베니젤로스는 크레타 반란군 지도자이자 열강 제독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능숙한 외교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195] 열강 4개국이 크레타 행정을 맡았고,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가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베니젤로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크레타 자치국의 사법부 장관을 지냈다.[196]
요르요스 왕자는 3년 임기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196] 1898년 12월 13일 하니아에 도착하여 전례 없는 환영을 받았다. 1899년 4월 27일, 요르요스 왕자는 크레타 지도자들로 구성된 행정 위원회를 설치하였고, 베니젤로스는 사법부 장관이자 행정 위원이 되어 자치국 조직에 힘썼다. 1900년 5월 18일 베니젤로스가 사법 입법 완성안을 제출하면서 요르요스 왕자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요르요스 왕자는 유럽 순방 중 열강에게 그리스와 크레타의 병합을 요청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197] 베니젤로스는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예상대로 열강은 왕자의 요청을 거부했다.[196][197]
요르요스 왕자가 궁전 건축을 희망한 반면, 베니젤로스는 크리티 주민들이 왕자의 통치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며 반대했다.[196]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베니젤로스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다.[198]
베니젤로스는 열강의 군대 주둔으로 크리티가 완전한 자치국이 아니며, 열강이 요르요스 왕자를 통해 섬을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자의 임기가 끝나면 열강은 헌법에 따라 위원회를 소집하고 새 원수를 선출하여 열강의 필요성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베니젤로스의 반대 세력은 그가 크리티를 자치 패권국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고, 베니젤로스는 재차 사직서를 제출하며 행정 위원들과 협력할 수 없다고 밝혔다.[196]
1901년 3월 20일, 베니젤로스는 "권한 없이 행정 위원회와 반대되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196][199] 이후 3년간 그는 요르요스 왕자에 대한 반대파의 영수가 되어 정치 갈등을 일으켰고, 섬의 행정은 마비되었으며 긴장 상황이 재연되었다.
3. 2. 크레타 자치국
그리스의 요르요스 왕자는 크레타 자치국의 최고 행정관으로 3년 임기로 임명되었다.[196] 1898년 12월 13일, 하니아에 도착하여 전례없는 환영을 받았다. 1899년 4월 27일, 요르요스 왕자는 크레타 지도자들로 구성된 행정 위원회를 설치하였고, 베니젤로스는 사법부 장관이자 행정 위원이 되었다. 이들은 자치국 조직을 담당했다. 1900년 5월 18일, 베니젤로스가 사법 입법 완성안을 제출하면서 요르요스 왕자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요르요스 왕자는 유럽 순방을 결정하고 크리티 주민들에게 "제가 유럽에 순방할 때 저는 열강에게 (그리스와 크레타의) 병합을 요청할 것인데, 저는 제 혈연 때문에 일이 성사되길 바랍니다"라고 발표하였다.[197] 이 발언은 위원회의 승인 없이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베니젤로스는 왕자에게 지금은 실행하기 어려운 일로 대중에게 기대를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왕자의 유럽 순방 중 열강은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196][197]
두 사람의 이견은 다른 사안에서도 나타났다. 요르요스 왕자는 궁전 건립을 원했지만, 베니젤로스는 크리티 사람들이 최종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왕자의 통치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며, 궁전이 왕자의 행정관직 지위를 영속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196]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베니젤로스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하였다.[198]
행정 위원회 회의에서 베니젤로스는 열강의 군대가 섬에 계속 주둔하고 있으므로 크리티는 본질적으로 자치국이 아니며, 열강이 자신들의 대리자인 요르요스 왕자를 통해 섬을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자의 임기가 끝나면 열강은 헌법 제39조에 따라 위원회를 소집해야 하며, 위원회에서 새로운 원수를 선출하여 열강 세력의 필요성을 없앨 것이라고 말했다. 열강 군대가 대리자들과 함께 섬을 떠나면 크리티와 그리스의 통합이 더 쉬워질 것이었다. 베니젤로스의 반대 세력은 이 제안을 이용하여 그가 크리티를 자치 패권국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베니젤로스는 이에 대응하여 다시 사직서를 제출하며, 행정 위원들과 협력할 수 없고 반대파 위원들과 함께할 뜻이 없다는 이유를 밝혔다.[196]
1901년 3월 20일, 베니젤로스는 "아무 권한도 없이 행정 위원회의 견해와 반대되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196][199] 이후 그는 요르요스 왕자에 대한 반대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 3년간 격렬한 정치 갈등으로 섬의 행정은 사실상 마비되고, 섬 전체에 긴장 상황이 재연되었다.
3. 3. 테리소 반란
1905년 3월 10일, 테리소에서 베니젤로스를 중심으로 반란군이 모여 "단일한 자유 헌법 국가로서 크리티와 그리스의 정치적 통합"을 선포하였다.[200] 이들은 열강에 전달된 결의안을 통해, 불법적인 임시 제도 때문에 크리티의 경제 발전이 저해되고 있으며 '크리티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와 통합하는 길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열강의 승인을 받은 최고 행정관은 반란군에게 군사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196] 그러나 테리소의 베니젤로스와 합류하는 위원들이 늘었다. 열강의 영사들은 무르니에스에서 베니젤로스와 만나 합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반란 정부는 크리티를 동부 루멜리아와 비슷한 정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7월 18일, 열강은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반란군의 기세를 꺾지는 못하였다. 8월 15일, 하니아의 정기 회의에서 베니젤로스가 제안한 개혁안 대부분이 찬성표를 얻었다. 열강의 영사들은 다시 베니젤로스와 만나 그의 개혁안을 수용하였다. 이 일로 테리소 반란이 끝나고 요르요스 왕자는 최고 행정관직에서 물러났다. 열강은 크리티의 새 최고 행정관을 정하는 권한을 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에게 맡겨 사실상 크리티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무효화하였다. 그리스의 전 총리였던 알렉산드로스 제미스가 최고 행정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그리스인 장교와 비(非)임명직 장교도 크리티 헌병대 조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헌병대가 조직되자 외국군이 섬에서 철수하였다. 이 일은 베니젤로스 개인에게도 승리였는데, 그는 그리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었다.[196]
4. 그리스 정계 활동
1909년 그리스에서 구디 군사 정변이 발생하여 베니젤로스가 아테네로 초청되었다.[202] 그는 군부와 협의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고 의회를 개혁할 것을 제안하였다.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 결국 베니젤로스의 개혁안을 수용하였다. 1910년 총선에서 베니젤로스는 자유당을 창당하여 압승을 거두고 총리가 되어 그리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였다.[20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편에 서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중립을 고수하려 했다.[141] 이로 인해 둘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베니젤로스는 1915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143] 그러나 이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지만, 국왕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16년 베니젤로스는 테살로니키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그리스는 사실상 분열되었다.[228] 연합국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베니젤로스는 다시 총리에 취임하여 그리스를 연합국 측에 가담시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했다.[148]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대표로 참석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세브르 조약을 통해 그리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162] 그러나 1920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152]
이후 그리스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베니젤로스는 1928년 다시 총리에 복귀하여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패하고, 1935년 쿠데타 실패 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158]
4. 1. 1909년 구디 군사 정변
1909년 5월, 청년 투르크당의 통일과 진보 위원회를 모방하여 그리스 군 장교들이 군사 연대를 결성, 정부 개혁과 군대 재조직을 시도했다.[202] 1909년 8월, 군사 연대는 지지자들과 함께 아테네 교외 구디에 진을 쳐 디미트리오스 랄리스 정부를 퇴진시키고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의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 군부는 내각에 직접 압력을 가했으나, 군사 연대를 지지하던 대중은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실행할 줄 모른다는 사실에 등을 돌렸다.[204] 이후 군사 연대는 베니젤로스를 크레타에서 데려와 지도자로 삼았다.[202]베니젤로스는 아테네에서 군사 연대 및 정계 인사들과 상의한 뒤 새 정부 설립과 의회 개혁을 제안하였다. 요르요스 1세와 다른 정치가들은 그의 제안을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위기 심화를 우려한 요르요스 1세는 정치 지도자들과 회동을 열어 베니젤로스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였다. 여러 차례 연기 끝에 임금은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에게 새 정부 수립을 맡겼고, 군사 연대가 해산되자 선거를 다시 열 수 있게 되었다.[203]
1910년 8월 8일 선거에서 정치 신인이던 무소속 의원들이 원내 의석 절반 이상을 장악하였다. 베니젤로스는 자신의 그리스 시민권에 대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직접 유세를 하지 않고도 아티키의 선거인 명부 맨 위에 올랐다. 그는 무소속 의원들의 지도자로 인정받아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선거 직후, 그는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기 위해 새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기존 정당들은 항의하며 새 선거를 보이콧하였으며, 1910년 11월 28일에 자유당은 300석 중 262석을 확보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치 신인이었다.[204] 베니젤로스는 정부를 수립하고, 그리스의 정치, 경제, 국정을 개혁하게 되었다.
4. 2. 1910년~1914년의 개혁
1909년 그리스 군 장교들은 청년 튀르크당의 통일과 진보 위원회를 본떠 군사 연대를 조직하고 정부 개혁과 군대 재조직을 추진했다. 이들은 아테네 외곽 구디에서 봉기하여 디미트리오스 랄리스 정부를 무너뜨리고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를 총리로 하는 새 정부를 세웠다.[204] 그러나 군사 연대는 곧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크레타 출신 정치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지도자로 초빙했다.[202]베니젤로스는 아테네에서 군사 연대 및 정치인들과 협의 후 새 정부 구성과 의회 개혁을 제안했다. 국왕 요르요스 1세와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위기 심화를 우려하여 결국 베니젤로스의 제안을 수용했다.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가 이끄는 새 정부가 구성되고 군사 연대가 해산된 후, 1910년 8월 총선이 실시되었다.[203] 이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들이 의석 절반을 차지했고, 베니젤로스는 아티키에서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자유당을 창당했다. 베니젤로스는 절대 과반수 확보를 위해 1910년 11월 다시 총선을 실시했고, 자유당은 300석을 확보하며 압승했다.[204]
총리가 된 베니젤로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상반된 정치 성향 사이에서 실용적인 타협을 추구하며 개혁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교육 분야에서는 민중 그리스어 사용을 지지하면서도, 헌법에는 카타레부사 사용 조항(제107조)을 삽입하여 보수파의 반발을 무마했다.[205]
1911년 5월 개정된 헌법은 개인의 자유 강화, 의회 입법 절차 개선, 의무 초등 교육 도입, 강제 수용의 법적 근거 마련, 공무원 영속성 보장, 외국인 초빙 권한 인정, 국가 위원회 재설치, 헌법 개혁 절차 간소화 등을 포함했다. 이러한 개혁은 공공 질서 확립과 경제 발전을 목표로 했다. 특히, 국가경제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초대 장관은 베니젤로스의 친구이자 이집트 출신 부유한 그리스인 상인 엠마누일 베나키스가 맡았다.[205]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는 노동법 관련 법안들이 제정되어 아동 노동 및 여성 야간 근무 금지, 주당 노동 시간 제한, 일요일 휴무, 노동 조직 규정 등이 마련되었다.[206] 또한 베니젤로스는 입법 및 안보 관리를 개선하고 테살리아의 무토지 농민들을 정착시키는 조치를 시행하였다.[205]
4. 3. 발칸 전쟁
1909년 5월, 그리스 육군 장교들은 젊은 튀르크 통일과 진보 위원회를 본받아 정부 개혁과 군대 재편을 시도하며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8월, 군사 동맹은 아테네 교외 구디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디미트리오스 랄리스 정부의 사퇴를 압박하여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이끄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군사 동맹은 의회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지만, 장교들이 요구를 실행할 방법을 몰라 초기 대중적 지지는 빠르게 사라졌다.[204] 이후 군사 동맹이 크레타 출신 베니젤로스를 지도자로 초청하면서 정치적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베니젤로스는 아테네에서 군사 동맹 및 정치 대표들과 협의 후 새 정부와 의회 개혁을 제안했다. 국왕과 정치인들은 그의 제안을 위험하게 여겼으나, 요르요스 1세는 위기 악화를 우려해 정치 지도자들과 협의회를 소집, 베니젤로스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권고했다. 여러 차례 연기 끝에 국왕은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베니젤로스의 지명)에게 새 정부 구성을 맡겼고, 군사 동맹 해산 후 선거가 가능하게 되었다.[203] 1910년 8월 8일 선거에서 의회 의석 절반 가까이를 그리스 정계의 신인인 무소속 의원들이 차지했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시민권 유효성에 대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직접 선거 운동 없이 아티키 선거 명단 맨 위에 올랐다. 그는 곧 무소속 의원들의 지도자로 인정받아 자유당을 창당했다. 선거 직후 절대 다수 확보를 위해 새 선거를 결정했고, 구 정당들은 항의하며 새 선거를 보이콧했다.[204] 1910년 11월 28일, 베니젤로스의 당은 362석 중 300석을 획득했으며, 당선된 시민 대부분은 정계 신인이었다. 베니젤로스는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의 경제, 정치, 국가적 문제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4. 3. 1. 배경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령이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에 사는 기독교도 주민들의 생활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외교적 접촉을 하였다. 개혁이 실패하면 오스만 제국을 발칸반도에서 몰아내고 발칸 국가들이 이 땅을 나눠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베니젤로스는 이 방책이 해볼만하다고 생각하였는데, 당시 투르크는 청년 투르크당의 헌정 과도기 중에 있었고 행정 조직이 혼란하고 약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207] 또 투르크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군대를 이동시킬만한 함대를 갖추지 못한 데 반해, 그리스 해군은 에게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육해군이 재조직되고(전 정권의 요르요스 테오토키스가 이미 그런 노력을 시작하였다) 경제가 회복될 때까지는 당장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208]베니젤로스는 오스만 제국에 '크레타 문제'를 종결하기 위하여 크레타 사람들이 그리스 의회에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청년 투르크당(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자신감이 있었다)은 그리스인들이 그런 요구를 하면 자신들이 아테네로 진군하겠다고 위협하였다.
4. 4. 발칸 동맹
오스만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 지역의 기독교 주민들의 생활 여건 개선을 위한 개혁에 실패했다. 베니젤로스는 오스만 제국을 발칸반도에서 몰아내고 발칸 국가들이 영토를 나누는 방안을 고려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청년 튀르크당 헌정 과도기로 행정 조직이 약화되었고,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군대를 이동시킬 함대가 없었던 반면, 그리스 해군은 에게해를 장악하고 있었다.[207]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육해군 재조직과 경제 회복을 기다리며, '크리티 문제' 해결을 위해 크리티인들의 그리스 의회 대표자 선출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청년 튀르크당은 이를 거부하며 그리스를 위협했다.[208]베니젤로스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때처럼 그리스가 중립을 지켜 평화 회담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하여,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와 동맹을 맺어 발칸 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 5월 30일,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상호 지원 조약을 체결했고, 세르비아와도 유사한 협정을 맺었다.[209]
1912년 10월 8일, 몬테네그로가 투르크에 선전포고했고, 9월 18일 그리스도 다른 발칸 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선포하며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210] 10월 1일, 베니젤로스는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크리티 대표자를 받아들여 크리티와 그리스의 통합을 선언했다.
4. 4. 1. 제1차 발칸 전쟁 -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의 갈등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면서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 사이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왕세자이자 미래의 국왕이었지만, 동시에 베니젤로스의 명령을 받는 그리스 국방부 소속 군 사령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복잡한 공식적 관계로 인해 베니젤로스가 군 지휘관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현실적으로 제약받았다.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군대는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 군사 작전의 목표를 두고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사이에 첫 불화가 발생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파하는 군사적 목표를 우선시한 반면, 베니젤로스는 전략적 요충지인 테살로니키를 포함한 넓은 영토와 주요 도시를 최대한 빨리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212]
사란타포로 전투에서 그리스 군이 승리한 후, 베니젤로스는 테살로니키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총참모부에 "Salonique à tout prix!"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살로니키를!)라는 전문을 보냈고,[212] 국왕 요르요스 1세와 연락하며 콘스탄티노스가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212]
결국 그리스 군은 얀니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테살로니키 점령을 주저하며 베니젤로스와 공개적으로 대립했다.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 군이 테살로니키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콘스탄티노스에게 책임을 경고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 사건은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의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두 사람 갈등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213]
1912년 10월 26일, 그리스 군은 불가리아 군보다 먼저 테살로니키에 입성했다.[213] 그러나 콘스탄티노스가 불가리아 군의 테살로니키 진입을 허용하면서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불가리아 군은 소규모 부대에서 사단 규모로 증강되어 테살로니키 공동 통치를 요구하며 철수하지 않았다. 베니젤로스는 콘스탄티노스를 질책하고 불가리아 군 철수를 명령했지만, 이는 불가리아와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어 실행하기 어려웠다. 베니젤로스는 콘스탄티노스가 군사 문제에 정치적으로 관여하려 한다고 여겼고, 콘스탄티노스는 베니젤로스가 자신의 군사적 결정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4. 4. 2. 제2차 발칸 전쟁
불가리아는 발칸반도의 패권국이 되길 원하여 과도한 요구를 내세웠고, 세르비아는 당초 불가리아와 합의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주장하였다. 세르비아는 열강이 알바니아를 성립시키면서 세르비아-불가리아 조약에서 세르비아 영토로 인정된 알바니아 북부를 잃었기 때문에 원래 조약을 개정하도록 요청하였다. 불가리아는 또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과 테살로니키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런던 회의에서 베니젤로스는 이 지역은 이미 그리스 군대가 점령했으며[216]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했던 것처럼 전쟁 전에 논의하면서 영유권 주장에 대해 어떠한 확실한 결정도 거부하였다면서 불가리아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불가리아의 고집으로 동맹국 간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불가리아는 이제 그리스 및 세르비아와 대립하게 되었다. 1913년 5월 19일, 그리스와 세르비아가 테살로니키에서 동맹 조약을 맺었다. 6월 19일에는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진지를 급습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다.[217] 3월에 부왕 요르요스가 암살되면서[218] 왕위를 계승한 콘스탄티노스 1세는 테살로니키에 주둔하던 불가리아군을 무력화하고 일련의 힘든 전투 끝에 불가리아군을 물리쳤다. 불가리아는 그리스 군대와 세르비아 군대에 제압당한데다 북쪽에선 루마니아 군대가 수도 소피아로 진군하자 결국 정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군 사령부가 있던 하지-베일리크로 가서 평화 협상 시 그리스의 영토권 주장에 대해 콘스탄티노스와 숙의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평화 협상이 열린 부쿠레슈티로 갔다. 1913년 6월 28일에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루마니아가 한편이 되어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두 번의 승전으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 이피로스, 크레타, 남은 에게 해 제도를 확보하여 영토를 갑절로 늘렸다.[219] 다만 이 가운데 에게 해 제도는 영토의 상태가 확정되지 않아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의 분쟁 요인이 되었다.
4. 5. 제1차 세계 대전과 그리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의 참전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베니젤로스는 삼국 협상 측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유지하려 하였다.베니젤로스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지중해에서 연합군의 해상 봉쇄가 그리스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아무도 지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221]라고 말하며 참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 제국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고, 왕비 소피아가 독일 출신이라는 점 등 친독일적인 성향을 보였다.[222][223]
1915년 윈스턴 처칠이 그리스에게 다르다넬스 해협에서의 군사 활동을 제안하자, 베니젤로스는 이를 연합국 측에 가담할 기회로 여겼으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반대하였다.[224] 결국 베니젤로스는 1915년 2월 사임하였으나, 이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다.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1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국왕의 권한을 들어 정부를 해산하고 베니젤로스를 다시 해임하였다. 베니젤로스는 크리티로 돌아가 국왕의 조치가 위헌이라고 비판하며 선거에 불참하였다.[226][227]
1916년,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연합군의 지원을 받은 베니젤로스는 왕당파에 맞서 국가 방위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로 분열되었다.[228]
4. 5. 1. 그리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논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참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리스는 제2차 발칸 전쟁의 원인이 된 1913년 불가리아의 공격 당시 세르비아와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이 조약은 발칸반도 내의 상황만을 염두에 두고 정한 약속이었으므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침공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었으며 베니젤로스와 콘스탄티노스 역시 동의한 바였다.[220] 그러나 연합국이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불가리아에겐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모나스티르(비톨라)-오흐리드 지방과 그리스령 동부 마케도니아(세레스 현, 카발라 현, 드라마 현 지역)를 제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가 연합국에 합류할 경우 소아시아를 확보하리라 확신하여 불가리아에 영토를 할양하는 데 동의하였다.[220] 그러나 콘스탄티노스가 반 불가리아 입장을 보여 거래가 불가능해졌다. 콘스탄티노스는 그러한 조건으로는 참전하길 거부하여 두 사람은 다시 갈라졌다.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합류하고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세르비아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리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가 삼국 협상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승리하리라고 믿었을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영국-프랑스의 해군이 강력한 제해권을 확보하고 있어서 만일 해상 봉쇄를 당할 경우 지중해에 그리스에 악영향을 끼치리라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리적인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그러나 콘스탄티노스 임금은 동맹국을 좋아하였으며, 그리스가 중립에 서길 원하였다.[222] 그는 독일 제국의 군사적 우위를 믿었을 뿐 아니라, 왕비 소피아가 독일 사람이었고 궁정도 친독일파였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유리하도록 그리스의 중립 유지를 고집하였다.[223]
1915년 윈스턴 처칠은 그리스가 연합국을 대신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군사 활동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224] 베니젤로스는 이를 그리스가 삼국 협상 편에 서게 할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국왕은 동의하지 않았고, 1915년 2월 21일에 베니젤로스는 사임하였다.[223]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은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며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4. 5. 2. 국론 분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참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연합국이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불가리아에겐 참전 조건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일부 지역을 제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가 연합국에 합류할 경우 소아시아를 확보하리라 확신하여 불가리아에 영토를 할양하는 데 동의하였다.[220]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가 반대하여 거래가 불가능해졌다. 콘스탄티노스는 참전을 거부하여 두 사람은 다시 갈라졌다.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합류하고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세르비아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리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베니젤로스는 영국과 프랑스가 승리할 것이며 해상 봉쇄를 당할 경우 그리스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예상하여 그리스가 삼국 협상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21]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 제국의 군사적 우위를 믿었을 뿐 아니라, 왕비 소피아가 독일 사람이었고 궁정도 친독일파였던 영향을 받아 동맹국을 좋아하였으며, 그리스가 중립에 서길 원하였다.[222][223]
1915년 윈스턴 처칠은 그리스가 연합국을 대신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군사 활동을 할 것을 제안하였다.[224] 베니젤로스는 이를 기회로 보았으나 국왕은 동의하지 않았고, 1915년 2월 21일에 베니젤로스는 사임하였다.[223]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은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며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베니젤로스는 중립 유지를 약속하였으나, 1915년 선거 이후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자신은 당초의 정책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국왕이 일방적으로 정부를 해산할 권리가 있다는 그리스 헌법 조항을 언급한 직후에 베니젤로스와 임금의 논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세르비아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1915년 10월에 삼국 협상은 테살로니키에 군대를 상륙시켰다.[225]
두 사람간의 논쟁은 계속되었으며, 1915년 12월에 콘스탄티노스가 두 번째로 베니젤로스를 억지로 사임시키고 자유당이 장악한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요청하였다. 베니젤로스는 아테네를 떠나 크리티로 돌아갔다. 그는 국왕의 의회 해산이 위헌적이라고 생각하여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226][227]
1916년 8월 16일, 아테네에서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모리스 사렐 장군 휘하의 연합군에 지지를 받아 베니젤로스는 공개적으로 왕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전면적인 반대를 천명하였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그리스 사람들은 왕당파(또는 '반(反)베니젤로스파')와 베니젤로스파로 양분되었다. 1916년 8월 30일, 베니젤로스파 군 장교들이 테살로니키에서 정변을 일으켰으며, "국가 방위 과도 정부"를 선포하였다. 이들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북부 그리스, 크리티, 에게 해 제도를 아우르는 분리된 "과도 국가"를 이루었다.[228] 국가 방위 정부는 마케도니아 전선에 투입할 군대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이내 동맹국 군대와 싸우는 군 작전에 참가하였다.

4. 5. 3. 11월 사건 - 그리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6년 10월 10일, 연합국은 아테네 정부에 그리스 함대 양도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그리스 정부는 마지못해 양보했다. 10월 19일에는 그리스 주요 군함의 부분적인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으며, 연합군은 30척 이하의 군함을 인수했다.[229] 3주 후 프랑스는 살라미나 해군기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프랑스 승무원들이 그리스 군함을 운용하기 시작했다.[230][231][232]1916년 11월 19일(구력 11월 3일), 연합군 부제독 루이 다르티주 뒤 푸르네는 아테네 정부에 동맹국 대사들을 추방하라는 새로운 최후통첩을 보냈다.[233][234] 그리스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1916년 11월 1일, 연합군은 해병대 3,000명[235]을 피레아스에 상륙시켜 아테네로 진군했다.[233][236] 그러나 총 20,000명이 넘는 그리스 군대와 왕당파 민병대가 연합군을 공격하여[233][237][238][239] 연합군은 군함을 철수해야 했다.[240] 이 전투로 연합군 해병대 194명, 그리스인 82명이 사망했다. 뒤 푸르네 제독은 아테네 시 일부 지역에 해상 포격을 명령했으며, 팔리로에 정박했던 연합군 전함은 왕궁 인근을 포격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하던 구력(율리우스력)에 따라 '11월 사건'(그리스어: Νοεμβριανά)으로 불리며, 국론 분열의 정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1916년 12월 2일(구력 11월 19일), 영국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베니젤로스의 정부를 합법 정부로 인정하여 그리스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다.[248] 그해 12월 7일(구력 11월 24일)에 베니젤로스의 과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동맹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콘스탄티노스 1세 임금의 폐위를 선포하였다.[249][250]

연합군은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퇴위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1917년 6월 15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이를 수락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연합국의 요구대로 왕세자 요르요스 2세 대신 차남 알렉산드로스 1세가 왕위를 이었다.[254][255]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917년 5월 29일 아테네로 돌아왔고,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리스 군 전체가 동원되어(왕당파와 베니젤로스 지지파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중부 동맹국에 맞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918년 가을, 9개 사단을 거느린 그리스군은 마케도니아 전선의 연합군 중 단일 국가로는 최대 규모였다.
1918년 9월 14일부터 그리스-세르비아-프랑스-영국 합동군은 불가리아와 독일 군대에 대규모 반격을 실시했다. 불가리아는 방어 진지를 포기하고 퇴각했으며, 9월 24일 불가리아 정부는 휴전을 요청하여 5일 뒤 협정이 체결되었다. 1918년 11월, 헝가리 지도부가 항복을 요청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독일의 항복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리스군의 참전과 마케도니아 전선 돌파가 연합국의 결정적인 승리 요소가 되었다.
4. 5. 4.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그리스군의 참전과 마케도니아 전선 돌파는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리스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니젤로스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88]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수석 대표로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그리스를 떠나 있으면서 국제 정치가로서 명성을 얻었다.[2]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파리에 모인 모든 대표들 중 평화 조건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 베니젤로스를 최고로 평가했다고 한다.[89]
1919년 7월, 베니젤로스는 이탈리아와 도데카니사 제도 할양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고, 이즈미르(스미르나) 주변의 그리스 영토를 확장했다. 1919년 11월 27일 불가리아와의 뇌이 조약과 1920년 8월 10일 오스만 제국과의 세브르 조약은 베니젤로스와 그리스 모두에게 승리였다.[2][90][91] 이 조약들에 따라 그리스는 서트라키아, 동트라키아, 스미르나, 에게 해 제도인 임브로스, 테네도스 및 로도스섬을 제외한 도데카니사 제도를 얻었다.[90]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광신주의는 여전히 대립하는 정당들 사이에 깊은 분열을 만들어내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그들을 몰아갔다. 1920년 8월 12일 귀국길에 베니젤로스는 파리 리옹역에서 두 명의 왕당파 군인들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92] 이 사건은 그리스에서 불안을 야기했고,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은 알려진 반베니젤로스파에 대해 폭력 행위를 저질렀으며, 국가 분열에 더욱 불을 지폈다. 베니젤로스 반대자들에 대한 박해는 이온 드라구미스[63]가 8월 13일에 준군사 조직 베니젤로스파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절정에 달했다.[93] 회복 후 베니젤로스는 그리스로 돌아왔고, 그는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해방시키고 "다섯 개의 바다와 두 개의 대륙"에 걸쳐 뻗어나가는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영웅으로 환영받았다.[63]
4. 5. 5. 세브르 조약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그리스 수석 대표로 참여한 베니젤로스는 뛰어난 국제 정치가로서 명성을 얻었다.[162][163]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평화 협상을 위해 파리에 모인 외교 대표단 가운데 베니젤로스를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256]1919년 7월, 베니젤로스는 이탈리아에게서 도데카니사 제도를 할양받기로 합의하고, 소아시아의 스미르나 주를 그리스 영토로 확보하였다. 1919년 11월 27일 불가리아와 맺은 뇌이 조약과 1920년 8월 10일 오스만 제국과 맺은 세브르 조약은 그리스와 베니젤로스에게 큰 성과였다.[162][257][258] 이 조약들로 그리스는 서트라키아, 동트라키아, 스미르나, 에게 해의 임브로스섬과 테네도스섬, 도데카니사 제도(로도스섬 제외)를 얻었다.[257]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당 간의 깊은 갈등은 계속되었다. 1920년 8월 20일, 귀국하던 베니젤로스는 파리의 가르 뒤 리옹 철도역에서 두 왕당파 병사의 공격을 받았으나 무사했다.[259] 이 사건으로 그리스에서는 베니젤로스파가 반베니젤로스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고, 8월 13일에는 베니젤로스파 준군사 조직이[260] 반베니젤로스파였던 이온 드라구미스를 암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23] 베니젤로스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그리스로 돌아와 "두 대륙과 다섯 바다"에 걸친 국가를 건설한 영웅으로 환영받았다.[223]
4. 6. 1920년 선거 패배와 대화재
1920년 선거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를 지지하는 반(反) 베니젤로스파는 370석 중 246석을 확보하며 승리하였다.[261] 이 선거 결과는 베니젤로스를 포함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223] 베니젤로스는 1912년 이래 계속된 전쟁으로 그리스 국민들이 지쳤기 때문이라고 패배 원인을 분석했다. 또한 베니젤로스파는 군 동원 해제와 소아시아 철수를 약속한 반대파의 공약이 강력한 무기였다고 판단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베니젤로스파의 권력 남용과 정적 탄압 역시 유권자들이 반대파에 투표하게 된 원인이었다.[262]국민 투표 결과에 따라 1920년 12월 6일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되었다.[223] 이는 소아시아의 새롭게 해방된 주민들과 콘스탄티노스 1세의 복귀를 반대하던 열강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261] 선거 패배 후, 베니젤로스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파리로 떠났다.[263]
반 베니젤로스파 집권 후, 소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경험 많은 친(親)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해임되고,[261] 그리스 군부가 터키 군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면서[263] 전쟁의 향방이 바뀌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그리스의 왕정 복고를 무스타파 케말과 화해할 기회로 삼았다. 1921년 4월, 모든 열강은 중립을 선언했고, 그리스는 홀로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264] 1922년 8월 26일, 케말 파샤는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고, 그리스군은 스미르나로 후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22년 9월 8일, 스미르나는 터키군에 함락되었다.(스미르나 대화재 참조)[264]
5. 망명과 죽음
베니젤로스는 파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계 은퇴 후 투키디데스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1936년 3월 12일 알렉산드로스 잔나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고, 3월 13일 아침 뇌졸중으로 쓰러져 5일 후 루 부종(rue Beaujon) 22번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했다.[274] 그의 시신은 그리스로 운구되기 전 파리의 그리스인 지지자들이 철도역까지 따르는 가운데 운구되었다.
유해는 구축함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호를 통해 하니아로 옮겨졌으며, 아테네에서는 소요 사태를 우려하여 경유하지 않았다. 크리티 아크로티리에서 열린 장례식은 수많은 인파가 몰린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5. 1. 1928년 재집권과 이후의 망명
1928년 7월 5일에 열린 선거에서 베니젤로스의 당이 승리하여, 같은 해 8월 19일에 새 선거가 열렸고 자유당은 원내 250석 가운데 228석을 얻었다. 다시 집권한 베니젤로스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그리스의 외교적 고립을 끝내고자 하였다. 그의 노력은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이탈리아와는 성공적이었다. 1928년 9월 23일 로마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와 협정을 맺었으며, 유고슬라비아와는 협상을 통해 1929년 3월 27일에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테살로니키에 유고슬라비아 자유 무역 지대 지위를 정하는 추가 의정서도 맺었다.[265] 아서 헨더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0년~1931년에 불가리아와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데는 실패하였다.[266] 알바니아와는 관계는 좋은 수준이었으나 미해결 사안은 진척이 없었다.[267]베니젤로스는 터키와의 화해를 이루었는데, 1928년 7월 23일 테살로니키에서 연설에서, 양국 관계 정상화를 원했다는 뜻을 전했다. 정부 구성 11일 만에 터키 이스멧 이노누 총리와 테브피크 루스튀 외무 장관에게 그리스가 더 이상 터키 영토에 욕심이 없음을 밝혔다. 이노누의 답신은 긍정적이었으며, 이탈리아는 두 나라가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왔다. 서로 교환되는 인구의 재산 문제 때문에 협상은 지연되었다. 1930년 4월 30일에 양측은 합의에 도달하였으며, 베니젤로스는 터키를 방문하여 터키와 우호 협정을 맺었다. 베니젤로스는 케말 아타튀르크를 1934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하였다.[269] 독일의 헤르만 뮐러 수상은 그리스-터키의 화해를 "대전쟁이 끝난 이래 유럽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국내에서는 반대파 뿐 아니라 자유당원들도 터키 출신 그리스 난민들을 대변하며 베니젤로스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베니젤로스는 로잔 조약을 맺으면서, 튀르키예에서 추방된 그리스인들의 재산과 해상 장비 문제를 놓고 터키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난받았다.[270]
1929년, 베니젤로스 정부는 '이디오니모'(ιδιώνυμο, '특별 불법령')이란 법을 도입하였는데, 이 법은 노동조합주의, 좌익 세력,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시민 자유를 제약하는 법이었다.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여파로 그의 국내 지위는 약화되었으며,[271] 1932년 선거에서 파나이스 찰다리스가 이끄는 인민당에 패배하였다. 1933년에 베니젤로스는 두 번째로 암살 시도를 당했다.[272]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장군의 주도로 1933년과 1935년에 정변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1935년의 정변 실패로 제2공화국의 운명이 결정났다. 베니젤로스는 다시 그리스를 떠났으며, 그리스의 재판정에서 베니젤로스파 저명 인사들이 처형되었으며, 그 자신도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35년 10월에 요르요스 콘딜리스의 정변으로 공화국은 막을 내렸으며, 그해 11월 국민 투표로 요르요스 2세 임금이 복위되었다.[273]
6. 개인사와 가족
1891년 12월, 베니젤로스는 엘레프테리오스 카텔루조스의 딸인 마리아 카텔루주와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할레파 집 위층에 살림을 차렸고, 베니젤로스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는 아래층에 살았다. 이들은 그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며, 1892년에 키리아코스를, 1894년에 소포클리스를 낳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짧았는데, 마리아가 1894년 둘째 아들을 낳은 뒤 산욕열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베니젤로스는 크게 상심하였으며, 슬픔의 표시로 자신의 특징인 수염을 죽을 때까지 길렀다.[166]
1920년 11월 총선에서 패배한 베니젤로스는 파리로 망명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 죽은 지 27년이 지난 1921년 9월, 그는 런던 하이게이트에서 헬레나 실리치(Helena Schilizzi)라는 부유한 여성과 결혼하였으며, 파리 루 부종 22번가의 아파트에서 새살림을 차렸다. 그는 1927년 하니아로 돌아올 때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166]
7. 유산
베니젤로스는 1910년 자유당을 창당하여 그리스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초 그리스 정당들은 프랑스당, 영국당 등 외국의 영향을 받거나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와 같은 특정 인물 중심이었으나, 자유당은 베니젤로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를 넘어 생존했다.[108] 자유당의 등장은 국왕 중심의 반대 정당 출현과 맞물렸고, 이 두 세력은 전쟁 기간 동안 권력을 다투었다.[109] 베니젤리즘은 자유주의, 공화주의 운동으로, 반(反)베니젤로스 왕당파 및 보수 이념에 반대했다.[108]
베니젤로스의 주요 사상은 군주제 반대, 메갈리 이데아 옹호,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의 동맹(이후 냉전 시기에는 소련에 맞선 미국과의 동맹), 그리고 보호무역 경제 정책이었다.[110]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는 1920년대부터 자유당을 이끌며 베니젤로스의 뒤를 이었다. 1950년에는 베니젤로스의 아들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가 자유당 대표를 계승했다. 1961년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창당한 중도연합은 자유당의 이념적 후계자가 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 쇠퇴하고 좌파 성향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범헬레니크 사회운동으로 대체되었다.[111]
베니젤로스는 생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15년부터 1921년까지 6년 동안 영어로 된 그의 전기 5권이 출판되었고, 신문에는 수많은 프로필이 실렸다.[112] 존 부찬의 1915년 소설 ''서른아홉 개의 계단''에 나오는 그리스 총리 콘스탄티노스 카롤리데스는 베니젤로스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112] 그는 발칸 국가 연합을 옹호하여 영국 언론에서 불안정한 발칸 지역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선견지명 있는 정치가로 묘사되기도 했다.[113]
아테네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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